몇 년 전에 정호승 씨의 '부도밭을 지나며'라는 시 한 편이 방탄소년단의 트위터에 올라와서 우연히 읽었던 적이 있다.
평소에 독서를 좋아하는 남준씨가 가끔 책이나 음악들을 팬들에게 추천하곤 하는데, 당시 BTS 멤버들 중 누가 이 트윗을 했는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남준씨가 이 시를 소개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짐작만 한다.
사실 작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첫 번째 기일이 얼마 전에 있었다.
한국의 추석과 가까웠던 첫 기일이었기 때문이었는지 몇 주 내내 일도 손에 잘 안 잡히고 마음이 참 복잡했었다.
한국엘 갈 수가 없으니 조촐하게나마 이곳에서 아버지께서 생전에 좋아하시던 음식을 준비하면서 정말 여러 가지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렸을 때의 명절이 내게는 마냥 신나고 즐거운 시간이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명절은 점점 그리움의 시간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그러다가 문득 몇 년 전에 우연히 본 이 시가 떠오른 이유는 내게는 아버지가 바로 그런 그리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사람은 죽었거나 살아 있거나
그 이름을 불렀을 때 따뜻해야하고
사람은 잊혔거나 잊혀지지 않았거나
그 이름을 불렀을 때 눈물이 글썽해야 한다...."
아직도 난 그 날 한 밤중에 한국에서 걸려왔던 전화 속의 동생들의 떨리는 목소리를 생생히 기억한다.
한밤중에 전화기가 울리면 전화기를 들기도 전에 느껴지는 막연한 공포에 가까운 서늘함은 아마도 나처럼 나이 드신 부모님을 떠나와서 외국이나 타지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벌써 일 년이 훌쩍 지났다니... 아직도 아버지를 떠나보냈다는 것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래서 아직도 아버지가 생각날 때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동안 아버지와의 따뜻했던 많은 기억 때문에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기도 하고, 순간 너무나 그리워 눈물이 나기도 하고, 아니면 둘 다...
어쩌면 첫 기일과 추석을 거의 동시에 지내면서 아버지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던 요즘이라서 더욱더 이 시가 내 마음에 와 닿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일 년을 가만히 돌이켜 보니, 사랑하는 소중한 사람을 잃는데서 오는 상실감은 마치 거센 파도와 많이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더라도 마치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많아서 마치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깊은 물 위에 떠다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아버지가 이젠 그 자리에 계시지 않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지만, 내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는 애써 강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상으로 돌아간 것처럼 행동하면서 이상하리만큼 어색하게 잔잔한 일상을 지낼 수 있는 날들이 있다.
하지만 생전에 아버지께서 무척 좋아하던 노래가 어느 날 갑자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거나, 아버지가 어릴 때 자주 사주시거나 좋아하시던 음식을 먹게 될 때, 아버지와 같이 갔던 곳을 우연히 지날 때, 아니면 사진들을 정리하다가 같이 찍은 사진들을 보게 되면, 갑자기 무서울 정도로 높이밀려오는 거대한 파도처럼 그리움과 슬픔이 순식간에 공포스럽게 덮치곤 한다.
그때마다 때론 그 감정의 파도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숨이 막혀 허우적거리기도 하고, 때론 차라리 내가 밑바닥으로 가라앉아버렸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서 크기 울고 싶을 때마다, 어쩌면 나보다도 더 힘들어하고 있을지도 모를 다른 가족들을 위해서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더 들기도 한다.
그래서 제발 바닥에 가라앉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버리지 않도록 열심히 수영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 이외의 방법이 없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다.
지난 주말 우연히 오랜만에 인스타그램의 피드에 올라온 사진들을 훑어보다가 아래의 사진에 달린 질문 하나를 보게 되었는데, 난 그 질문에 대해서 지체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https://www.instagram.com/p/B2awP4dHCW_/
"만약 당신이 이 벤치에 앉아서 한 시간 동안 과거나 현재의 그 누구와도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요?"
이 질문의 아래에 달린 다양한 댓글들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간혹 신이나, 과거의 자기 자신, 유명한 정치인, 첫사랑 등의 대답을 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나처럼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가족들이라고 대답한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결국 국적이나 인종을 떠나서 우린 모두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하게 된 것은 생전에 아버님을 더 자주 뵙고 통화를 자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후회였다. 그래서 이제 혼자 남으신 어머니께 더 잘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한국을 떠나 온 이후에도 곁에서 부모님을 정성스럽게 챙겨 온 한국의 동생들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이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홀로 남으신 어머니 곁에 동생들이 가까이 있어서 그나마 정말 다행스럽고 감사하다.
***
There's no way around grief and loss:
you can dodge all you want,
but sooner or later
you just have to go into it,
through it,
and, hopefully, come out the other side.
The world you find there
will never be the same
as the world you left.
-Johnny Cash -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깨닫게 되는 한 가지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소위 잊어야하거나 '극복'해야 하는 감정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영국에서 다니고 있는 성당의 신부님도 그런 말씀을 해주셨다.
예전에는 힘들거나 마음이 아픈 일이 있을 때마다 시간이 약이라서 결국 잊을 거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는데, 난 일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하루에도 몇 번씩 아버지가 생각나고 그때마다 가슴이 시리도록 그립다. 존경하고 사랑했던 마음이 컸던 만큼 그리움도 그만큼 크고 오래 가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Coco라는 영화에서 보았듯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히지 않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는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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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이 벤치에 앉아서 한 시간 동안 과거나 현재의 그 누구와도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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