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 내가 사는 요크셔 북부 지방과 스코틀랜드 지방에 첫눈이 내렸다. 하지만 출근길에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첫눈으로 뒤덮인 영국의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하며 느꼈던 설렘은 얼마 지속되지 않았다. 출근길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미국 대선 결과 발표 때문이었다.
미국 대선 결과를 지켜보면서 처음 느꼈던 감정은 이곳 영국에서 브렉시트 투표 결과를 보던 날 아침에 느꼈던 심정과 너무나 비슷했다. 설마 하던 일이 현실화되는 것을 보면서 밀려오는 여러 생각들… 그리고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작품 하나…
Edvard Munch, 절규 (The Scream, 1893),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The_Scream.jpg)
어제 오후 미국의 친구들에게서 선거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이 현지에서 느끼는 절망감과 좌절감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이 번 미국의 대선 결과는 한국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에 큰 영향을 줄 것이므로 그냥 미국인들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2016년 미국 대선 결과 (출처 USA Today)
출처: 트위터 @marcmaron
이번 미국 대선의 투표 결과 분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브렉시트 때와 유사한 점이 많은 것 같다. 더구나 클린턴 지지율 (25.6%)과 트럼프 지지율(25.5%)의 차이… 정말 아주 작은 차이이다. 그런데 비투표인 비율은 46.9%!!
미국의 선거인단 제도의 특성상 실제 득표수가 더 많았음에도 과반수의 선거인단 확보에 실패한 힐러리 클린턴을 보면서 미국의 선거제도가 복잡함을 다시 한 번 느낀다. 또 민주주의라는 것이 왜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하루 종일 미국의 대선 결과를 놓고 여러 가지 분석도 많이 나왔고, 환호하는 이들과 절망하는 이들 사이에서 격하게 주고받는 말들도 많았다. 이곳 영국의 언론에서도 예상 밖의 결과를 놓고 미국의 장래는 물론 세계 경제에 대한 우려가 많았던 것 같다. 그중 해리 포터의 작가인 영국인 J.K. Rowling이 어제 대선 결과를 보면서 트위터에 올린 글에 대해서 몇몇 미국인들이 그녀에게 이건 미국일이니까 넌 신경끄라며 인신공격을 시작했을 때 그녀가 한 말이 정말 가슴에 와 닿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모욕받는 것을 원치 않을 때 침묵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처럼 똑같은 일을 당할 때 애써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고개를 숙이고 약자를 괴롭히는 자들이 미친듯이 날 뛰게 내버려두는 것은 쉬운 일이다.
우리가 해야할 옳은 일은 인종차별주의나 여성비하주의, 증오들에 대해서 대항하는 것이다.
난 트롤에 신경 안 쓴다.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표현하는 것은 혹시라도 위협을 받고 있는 그 누군가에게 그들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의 대선 패배 연설을 들으면서 민주주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희망을 가져본다. 그녀는 트럼프가 선거에 이겼으니 대통령이 되어야 하고,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의견이라도 각자의 의견을 존중해야 하니 그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의견이지만, 그의 의견을 존중하듯이 서로 입장이 다를 땐 우리의 의견도 적극적으로 방어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즉, 여기에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할 일이 더욱 많아졌다는 의미이다.
그녀의 연설 중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말 하나는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위해서 투쟁하다가 실패하거나 좌절하는 경우가 있을 때라도 정의를 위해서 싸우는 것 자체가 가치있는 일이라는 믿음은 절대 잃지 말아달라'는 당부의 말이었다.
출처: 보그 잡지 인스타그램 (www.instagram.com/voguemagazine)
80년대 후반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겪으면서 대학 생활을 보낸 나는 그녀의 이 말이 단지 미국 국민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미국의 대선 결과나 브렉시트의 투표 결과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느끼는 이유는 이런 이슈가 단지 미국이나 영국 만의 이슈가 아닌 전 세계에 가져올 수 있는 파장을 우려해서만 은 아니다. 지난 18개월 동안 너무나 자극적이고 무례한 발언들을 해왔던 사람이 이렇게 지도자로 당선될 수도 있다는 충격에서 오는 실망감이 컸기 때문만도 아니다.
사실 난 힐러리 클린턴의 100퍼센트 지지자라기보다는 도널드 트럼프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잠시 유학 생활을 하긴 했지만, 내가 태어난 나라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 아이들이 살아야 할 나라도 아닌 미국의 힐러리 클린턴의 대선 패배 연설 마지막 부분을 들으면서 눈물이 난 이유는 그녀의 연설을 들으면서 문득 내가 오래전에 떠나온 고국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80년대 말의 상황과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요즘의 한국 관련 뉴스를 들을 때마다, 한국의 국민들이 느끼는 절망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월호 사태에 이어 국정교과서, 또 이번엔 국정농단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을 보고 촛불시위를 하며 다시 길거리에 나올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의 사람들이 오랜 시간 느껴왔을 깊은 상처와 분노, 좌절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아파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곳의 언론이나 유튜브로 고국의 소식을 들으면서 잘 알게 되었다.
하지만 외국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이렇게 외신에 보도되는 한국의 정치 관련 뉴스를 보면서 부끄러움보다는, 오히려 부정과 불의에 대해서 저항하는 한국의 시민정신에 더 자부심을 갖게 된다. 일부 정치인들의 말도 안 되는 행동에 국민들이 침묵하지 않고, 결코 포기하지 않으며 꿋꿋하게 의사를 표현할 줄 아는 국민들이 있는 나라... 그런 강하고 깨어있는 시민의식 덕분에 이제까지의 수많은 정치적인 위기를 겪으면서도 대한민국이 이렇게 꿋꿋이 굳게 버티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입장을 함께 나눌 수 있고, 평화적으로 시위할 수 있고, 아프고 상처받고 소외된 이들을 함께 안아주고 위로해주는 따뜻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 나라, 시민의 의사표현의 자유가 불편한 교통체증 문제보다 더 우선이라고 시위를 허가해 줄 수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난 자랑스럽다. 내가 그런 특별하고 소중한 나라인 대한민국에서 교육받고 성장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난 한국의 국민들이 이러한 위기를 겪을 때마다 분노와 절망에 마음 아파하기 보다는 결국 정의가 이길 것이라는 희망을 더 생각했으면 좋겠다. 밝은 해를 향해 돌아서면 어두운 그림자는 곧 뒤로 멀어져 버린다는 말처럼…
대한민국…여러모로 아직은 참 괜찮은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시기에 다들 힘내시라고 멀리에서나마 응원하겠습니다.
***
Oh, I forgot to mention this… 아래는 어제 우리 8살 딸을 학교에서 데리고 오는 길에 나눈 대화입니다…
'So, how was your day?' (오늘 어땠니?)
'Great!' (아주 좋았죠.)
'Did you do anything interesting?' (흥미로운 일은 있었니?)
'Yes, we learned how to write letters of complaint…' ( 예, 불평하는 편지를 어떻게 써야하는지를 배웠어요.)
'So what did you complain about?' (넌 무엇에 대해서 불평을 했는데?)
'I wrote to Donald Trump.' (전 도널드 트럼프에게 편지를 썼어요)
'What did you say? (뭐라고 썼는데?)
'Well, he once called a woman 'a pig' and I don't think it was a nice thing to say.' (언제가 그가 여자를 돼지라고 불렀는데, 그건 좋지 않은 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
아마도 학교에서 아이들끼리 이야기를 하다가 들은 말일텐데, 그가 했던 수많은 다른 험한 말들을 딸이 모른다는 것에 감사했다. 영국의 학교에서 약자를 괴롭히는 Bully에 대해서 교육을 많이 시키는데, 그동안 험한 말을 해오면서 bully처럼 행동했던 그가 어떻게 당당히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는지를 내 딸들에게 설명해줄 방법이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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