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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일상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London Eye… and Tears. lady Expat.
London Eye… and Tears. © 2016 Lady Expat (https://lady-expat.tistory.com). All rights reserved.

 

요즘 계속 비가 오락가락하더니, 역시 오늘도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1990년 가을어었던가... 정확한 날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렇게 비가 내리던 어느 저녁, 대학시절 때 잠시 같이 자취를 하며 지내던 친구를 따라 한 자선단체의 기금 마련 행사에 갔던 적이 있다.

 

당시 인기가 있던 시내의 한 카페/바에서 가수들을 초청해서 라이브 콘서트도 하는데 친구가 티켓을 구했다는 것이었다. 라이브 콘서트는 물론 자선단체 기금 마련을 위해 술과 음식도 판매한다는 친구의 말에 비가 오는 저녁에 우산을 들고 같이 집을 나섰다. 

 

우리가 행사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워낙 사람이 많아서 겨우 어두운 구석에 남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었다. 우리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남자가 우리 테이블의 빈자리를 가리키며 자기가 거기 잠깐 앉아서 무대에 오르기 전에 기타 튜닝을 해도 되냐고 물어보았다. 우리는 물론 쾌히 승낙했다. 그는 즉시 그 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고 기타를 튜닝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그 자욱한 담배 연기가 싫어서 애써 고개를 돌리고 우리끼리의 대화에 다시 몰입했다. 

그런데 그에게 자꾸 사인을 해달라고 사람들이 한두 명씩 우리 테이블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두운 조명 아래의 담배연기 뒤로 약간 초췌해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가 과연 누굴까 하고 순간 궁금해졌다. 하지만 아는 사람도 아닌데 뒤늦게 사인을 해달라고 하기도 좀 어색했다. 

 

친구와 나는 그가 줄곳 피워대는 담배의 연기가 너무나 참기 어려웠지만, 다른 곳에는 빈 좌석이 없어서 그냥 참고 앉아 있어야했다. 그는 튜닝 도중에도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싫은 내색 하나 하지 않고 사인을 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한 15분 정도 있다가 그가 마침내 무대로 나갔을 때,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더 이상 담배연기를 맡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런데 무대에 올라간 그가 노래를 시작하는 순간 그제야 왜 사람들이 그토록 그의 사인을 받으려 몰려들었었는지 알게 되었다.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해요…'  

 

그는 가수 김현식이었다!!


1980년대 후반에 고등학생이었거나 대학 생활을 했던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의 노래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친구나 나 역시 그의 노래를 너무나 좋아했고 자주 들었지만, 난 그를  텔레비전에서 자주 보지는 못했다. 더구나 그날 저녁 우리 앞에 앉아 있던 그는 텔레비전에서 보던 모습과는 달리 너무나 말라 보여서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친구와 나는 그의 사인을 받지 않았던 것을 두고 두고 후회했던 것 같다. ㅠㅠ 나중에 친구가 그 당시 그의 건강 상태가 이미 많이 악화되어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그날 기금 마련을 돕기 위해 취소하지 않고 기꺼이 행사장에 나타났던 것 같다고 했다. 몇 달 뒤 뉴스에서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을 접했을 때는 정말 놀랐다. 너무나 젊은 나이였기에 더 안타까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비가 내리는 오늘 같은 날이면 그의 음악이 갑자기 생각날 때가 많다.

 

November Rain, London. Lady Expat.
November Rain, London © 2016 Lady Expat (https://lady-expat.tistory.com). All rights reserved.

 

오늘도 이곳 영국엔 여전히 비가 내린다.

 

삼일 정도 비가 오지 않아서 웬일인가 했는데, 아침에 창밖의 빗소리 때문에 평소보다 훨씬 일찍 잠에서 깨었다. 어느덧 3월인데도 아직도 아침에는 제법 쌀쌀하고, 심지어 지난주에는 서리까지 몇 번 내리기도 했다. 이젠 정말 봄이 올 때도 된 것 같은데... 

 

 

Foggy Car Park. Lady Expat.
Foggy Car Park © 2016 Lady Expat (https://lady-expat.tistory.com). All rights reserved.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알고 있겠지만 영국의 잦은 비와 짙은 안개는 겨울에 더욱 심하다. 특히 작년 11월부터 12월 말까지 거의 매일 많은 양의 비가 내렸는데,  영국 곳곳에 홍수가 났다는 뉴스를 혹시 보신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영국 날씨는 워낙 변덕스러우니 예측이 어려운 편이다. 아침에 해가 나서 오늘은 우산이 필요 없겠다는 생각에 집에 두고 나서면 한 30분도 못되어 갑자기 장대 비가 내리기 일쑤이고, 심지어는 해가 쨍쨍한데도 우박이 쏟아지는 일까지 있다. 그래서 '호랑이가 장가가는 날' 같은 날씨 덕분에 무지개를 보는 일도 아주 흔하다. 영국 생활 초기에는 이런 변덕스러운 날씨를 잘 몰라서 빨래를 밖에 널어놓고 잠깐 외출했다가 낭패를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Lovely Day for Ducks. Lady Expat.
Lovely Day for Ducks © 2016 Lady Expat (https://lady-expat.tistory.com). All rights reserved.

 

그래도 나는 비 오는 날이 아직은 좋다. 비가 오는 날이면 생각나는 행복한 기억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가끔 차를 마시기 위해 주전자를 올려놓고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창밖을 내다보다가 문득 이런 행복한 추억들이 갑자기 떠올라서 가끔 미소 지을 때가 있다.

유리창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면, 아주 어릴 적 시골 외가에서 외할머니 무릎을 베고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낮잠에 빠지던 추억도 생각난다. 그리고 초등학교 입학식 때 외할아버지께서 처음 사주신 노란 우비와 장화를 신고 너무 좋아서 일부러 빗속을 한참 뛰어다니던 일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또, 비 오는 날마다 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시던 각종 부침개와 고등학교 때 야간자습 중에 친구들과 몰래 빠져나가 먹던 매운 떡볶이와 따뜻한 어묵 국물 맛도 생각나고, 등하굣길 만원 버스 안의 수증기로 가득 찬  유리창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친구들과 깔깔대던 날들을 추억하며 나도 모르게 미소 짓게 된다. 

 

또 직장 생활을 하던 20대에는 친구들과 주말에 만나서 전망 좋은 카페의 창가에 앉아 비 내리는 거리를 내려다 보면서 커피도 마시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하던 행복한 시간들이 너무나 그립기도 하다. 또 파리의 몽마르트에서 갑작스러운 비를 잠시 피하기 위해 들어갔던  한 카페 안에서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서, 그 카페 벽에 수많은 관광객들이 남기고 간 쪽지들 사이에, 나도 이 곳에 다시 오고 싶다고 엽서를 써서 꽂아놓고 왔는데... 아직도 그 쪽지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까... 

 

Feeling Blue. Lady Expat.
Feeling Blue © 2016 Lady Expat (https://lady-expat.tistory.com). All rights reserved.

 

 

 

 

Little Heart. Lady Expat.
Little Heart © 2016 Lady Expat (https://lady-expat.tistory.com). All rights reserved.

 

난 비가 멈추고 난 뒤에 더욱 선명해 보이는 나뭇잎들이나 도로에 내린 빗물에 반사되는 도시의 불빛이 더욱 따뜻하고 편안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때로는 유리창 너머로 흐르는 물방울이 마치 작은 보석들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비 때문에 길 위에 떨어진 꽃잎이나 나뭇잎들도 지저분하다는 느낌보다는 그저 아름답게 느껴진다. 

 

따뜻한 펍이나 카페 안에 앉아서 수증기가 가득한 유리창 뒤로 지나가는 흐릿한 행인들의 그림자나 차량의 불빛이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이 느껴지는 것도 좋다. 대도시에서 자라서인지 비 오는 거리의 적막함도 좋고 시내의 펍이나 레스토랑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불빛이나 음악을 들으면 왠지 더욱 정겹게 느껴지고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져 온다. 그래서  그럴때마다 손에 잡히는 제일 가까운 카메라(대개는 모바일폰)로라도 찍어서 그 아름다운 순간을 좀 더 오래 기억하고 싶다는 마음에 비 오는 날 찍은 사진들이 정말 많은 것 같다.

 

 

 

Rain in the City. Lady Expat.
Rain in the City © 2016 Lady Expat (https://lady-expat.tistory.com). All rights reserved.

 

 

 

 

Autumn. Lady Expat.
Autumn © 2016 Lady Expat (https://lady-expat.tistory.com). All rights reserved.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가장 생각나는 사진작가가 Saul Leiter이다.

 

Saul Leiter 미국 펜실베이니아 출신인데 내가 몇 년 전부터 무척 좋아하게 된 사진작가이자 화가이다. 안타깝게도 2013년에 사망했는데 Saul Leiter 사진의 특징은 당시 흑백 사진만이 예술이라는 당시의 기존 관념을 깨고 1948년부터 컬러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 50년대-60년대에  찍은 사진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현대적이고 획기적인 구도뿐만 아니라 사진에 강한 색으로 악센트를 주는 기법을 많이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비 오는 날 뉴욕 카페의 유리창에 서린 습기나 뉴욕 거리의 상점들이나 카페의 유리나 거울의 반사 등을 그의 사진에 즐겨 사용했는데, 아마도 그래서 비 오는 날이면 이 사진작가가 생각나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사진들을 보면 가끔 인상파 화가, 특히 드가 (Edgar De Gas)의 그림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Saul Leiter의 사진들을 보시고 싶으시면 아래의 링크를 누르시면 됩니다. (Pinterest):

https://uk.pinterest.com/tedforbes/saul-le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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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Saul Leiter에 대해서 더 관심이 있으신 분은 아래의 동영상을 참고하세요. 이 동영상들은 사진작가 Saul Leiter에 대해서 Ted Forbes (the Manager of Multimedia for the Dallas Museum of Art)라는 사람이 제작한 것입니다.  사진학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이분의

 유튜브 채널  'The Art of Photography'

를 방문해 보시길 적극 추천해 드립니다.

 

 

Thank You! -Lady Exp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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